『붉은 연의 소원』(Plum Puddings & Paper Moons)은 내가 『내 동생, 티시킨』에 이어 번역 중인 실크 가족 이야기 다섯 번째 책이다. 이번에도 시작은 작고 고요한 상실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나는 그리핀과 스칼렛, 그리고 레일라가 건초 더미 속에서 소원을 비는 장면을 번역하다가 멈춰 서게 되었다.
열다섯 살이 된 스칼렛은 할머니의 말이 이루어질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까만 타이츠와 부서진 다리(bridge)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이 문장을 나는 한참 붙들고 있었다. 검정 타이츠와 부서진 다리. 아무 상관없는 두 사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원문은 이렇다:
She didn’t know what she could do with black tights and a broken bridge.
처음엔 ‘다리’를 신체로 착각했다. 까만 타이츠와 이어지는 단어니까. 하지만 곧 원서를 다시 확인했다. 다리는 bridge, 분명히 우리가 강을 건널 때 이용하는 구조물이었다. 왜 브리지를 썼을까. 이 표현이 단지 물리적인 다리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장은 스칼렛이라는 소녀가 자신의 ‘현재’를 마주하는 방식이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무너진 연결 앞에 서 있는 소녀의 마음. 검정 타이츠는 아마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일 테지만, 어쩌면 아직 자라지 못한 몸, 아직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은 시간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너진 다리는 그 모든 슬픔과 단절, 아직 건너지 못한 감정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녀는 까만 타이츠와 무너진 다리를 가지고 뭘 할 수 있을지 아직 알지 못했다.
혹은 이렇게도 써보았다:
그녀는 까만 타이츠를 신고 무너진 다리를 마주한 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몰랐다.
이런 병렬 구조, 즉 black tights and a broken bridge 같은 구절은 영미권 문학에서 자주 발견된다. 물리적인 사물과 감정, 구체적인 대상과 상징적인 이미지를 나란히 두어 인물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들이 있다:
- with empty pockets and a heart full of stormclouds → 텅 빈 주머니와 먹구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안고
- barefoot and carrying broken dreams → 맨발로 부서진 꿈을 품고 걷는
- a pink dress and the weight of goodbye → 분홍 드레스를 입은 채 작별의 무게를 안고 있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함께 놓이는 순간, 우리는 그 사이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읽게 된다. 번역자는 바로 그 여백을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
『붉은 연의 소원』은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을 다룬다. 이름을 부여하는 일은, 그래서 이 시리즈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내 동생, 티시킨』에서 오빠 그리핀이 이름조차 없던 아기 동생에게 ‘티시킨’이라는 이름을 선물하듯, 『붉은 연의 소원』에서도 아이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힌 소원을 하나씩 꺼내어 말로 만든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서 나는 스칼렛이 품고 있는 이름 없는 감정, 부서진 다리처럼 아직 건너지 못한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번역자의 마음으로 다리를 놓아보려 한다.
이 문장은 나중에 또 어떻게 다듬어질지 모른다. 이래서 번역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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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일 #1, 여기에 있어요:
내 동생 티시킨
아이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떠났다.그리고 어느 날, 그 어떤 상처도 아픈 곳도 없었는데,모두가 잠든 그날 조용히 실크 왕국을 떠났다.실크 왕국에서는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생일날 이름을
jajubora.tistory.com
이번 글은 그 이야기에 이어지는 다섯 번째 꼭지예요.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검정 타이츠와 부서진 다리'라는 표현,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옮기고 싶으셨나요?
댓글로도, 마음으로도, 언제든지 이야기 걸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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