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일 6

독자가 궁금하지 않은 건 굳이 - 옮긴이 주

독자가 궁금하지 않은 건 굳이 – 옮긴이 주번역서를 편집하다 보면, 종종 이런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이건 설명해줘야 하나?”“아니면 그냥 지나가도 될까?” 옮긴이 주, 혹은 역자의 설명은독자를 배려하는 장치이기도 하고,동시에 텍스트의 몰입을 깨는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설명을 더하는 게 무조건 친절한 건 아니다.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정직한 전달이 된다.장르에 따라 달라지는 옮긴이 주의 역할옮긴이 주가 필요한가 아닌가는단지 정보량의 문제보다 **‘장르적 위치’**에서 먼저 따져야 한다.예를 들어 정보 중심의 교양서, 자기계발서, 논픽션에서는옮긴이 주가 오히려 이해와 신뢰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개념이나 제도를 정확히 설명해주는 것은해당 분야의 독자들이 기대하는 기본적인 ‘정보 설계’이기 때문이다...

읽고 쓰는 일 2025.04.18

세대를 넘어 기억을 잇는 사랑 이야기 - 『할머니의 기억』

세대를 넘어 기억을 잇는 사랑 이야기 - 『할머니의 기억』글렌다 밀러드 글 · 스티븐 마이클 킹 그림 · 조윤진 옮김 | 자주보라“서로의 영혼을 위로하는 꿀 도넛 같은 이야기”『할머니의 기억』은 치매를 앓는 할머니와 소녀 레일라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다.실크 왕국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동화책이지만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기억을 잃어가는 아멜리 할머니와,기억을 나누고 싶은 레일라.둘은 사진에 이름을 붙이고, 하트 모양 스티커를 붙이며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든다.그 과정을 통해 독자도 아주 천천히 그들 곁에 앉게 된다.“기억이 영혼을 떠났다고 해도, 사랑은 남는다.”나는 이 책에서아멜리 할머니가 전쟁터에 나간 연인을 잊지 못해 기차역에 나가 기다리는 장면이 오래도록 남았다.기억은 흐릿해..

읽고 쓰는 일 2025.04.12

글도 김치도 익혀야 맛이다 -김장형 퇴고

원고를 만지는 일을 하다 보면, 잘 안 풀리는 날이 사실상 매일이다.뭘 하나 붙잡고 있으면,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저렇게 고쳐본다.그러다 보면 처음 의도와는 거리가 먼 문장이 되어버린다.쓰는 건 그래도 괜찮은데, 고치는 건 늘 어렵다.그런데 이번엔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초벌 수정한 다음에 묵혀야겠다.” 이른바 ‘김장형 퇴고’다. 김장형 퇴고란 무지개항아리 에디터가 주창했다.(사실 이전에 누가 말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내가 주창한 걸로 한다.)여기서 중요한 건 글을 쓰고, 바로 먹지 않는다는 것.김장을 하듯,한 번 써두고 묵혀둔다.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고, 그 안에 고이 넣어둔다.그리고 한참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슬쩍, 항아리 뚜껑을 연다.시간을 두고 숙성시키고,온도를 맞춰가며 다시 꺼내보는..

읽고 쓰는 일 2025.04.09

문장이 아니라 생각 - 맥킨지 글쓰기

매끄러운 글, 그 출발점은 문장이 아니라 생각이다요즘 부쩍 눈에 자주 띄는 키워드 중 하나가 있다.바로 ‘맥킨지식 글쓰기’다.맥킨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저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그들이 글쓰기를 다룬다’는 얘기조차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최근 한 논리적 글쓰기 책을 편집하면서,‘맥킨지식 글쓰기’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었다.글을 구조화하고, 핵심부터 전달하는 방식이생각보다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이었기에 인상 깊었다.문장이 어색한 건, 생각이 흐트러졌다는 신호다문장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 그 원인은 문장 자체보다글쓴이의 생각 정리에 문제가 있었던 경우가 많다.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억해야 할 문장 구조의 원칙이 있다.문장이 이해되기 어려운 건, 대개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어긋..

읽고 쓰는 일 2025.04.02

까만 타이츠와 부서진 다리

『붉은 연의 소원』(Plum Puddings & Paper Moons)은 내가 『내 동생, 티시킨』에 이어 번역 중인 실크 가족 이야기 다섯 번째 책이다. 이번에도 시작은 작고 고요한 상실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나는 그리핀과 스칼렛, 그리고 레일라가 건초 더미 속에서 소원을 비는 장면을 번역하다가 멈춰 서게 되었다.열다섯 살이 된 스칼렛은 할머니의 말이 이루어질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까만 타이츠와 부서진 다리(bridge)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이 문장을 나는 한참 붙들고 있었다. 검정 타이츠와 부서진 다리. 아무 상관없는 두 사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원문은 이렇다:She didn’t know what she could do with..

읽고 쓰는 일 2025.03.29

내 동생 티시킨

아이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떠났다.그리고 어느 날, 그 어떤 상처도 아픈 곳도 없었는데,모두가 잠든 그날 조용히 실크 왕국을 떠났다.실크 왕국에서는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생일날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다.그래서, 티시킨은 이름을 받지 못했다.그리핀은 자신이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아기가 떠난 것 같다고 믿었다. 동생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죄책감은 조용한 소년 안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동생에게 자신만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내가 그 애 얼굴을 내려다봤을 때 나뭇잎들이 그런 소리를 냈거든.”“정말 예쁜 이름이다. 티시킨, 티시킨.” 그날, 그리핀 안에서 아주 작고 조용했던 용기의 불꽃이 살아났다.  나는 이 용기의 불꽃이 흔들리는 ..

읽고 쓰는 일 2025.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