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만지는 일을 하다 보면, 잘 안 풀리는 날이 사실상 매일이다.
뭘 하나 붙잡고 있으면,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저렇게 고쳐본다.
그러다 보면 처음 의도와는 거리가 먼 문장이 되어버린다.
쓰는 건 그래도 괜찮은데, 고치는 건 늘 어렵다.
그런데 이번엔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초벌 수정한 다음에 묵혀야겠다.”
이른바 ‘김장형 퇴고’다.
김장형 퇴고란 무지개항아리 에디터가 주창했다.
(사실 이전에 누가 말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내가 주창한 걸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글을 쓰고, 바로 먹지 않는다는 것.
김장을 하듯,
한 번 써두고 묵혀둔다.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고, 그 안에 고이 넣어둔다.
그리고 한참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슬쩍, 항아리 뚜껑을 연다.
시간을 두고 숙성시키고,
온도를 맞춰가며 다시 꺼내보는 것.
급히 고치지 않고,
마음도 문장도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
그게 나한테 맞는 리듬이자 방법이다.
“내가 쓴 거라고? 오 마이갓!”
“이 문장, 뭐야. 너무 좋은데?”
“그제 쓴 건데 왜 이렇게 오글거려?”
김장형 퇴고의 핵심은 이거다.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는 내일의 내가 가장 잘 안다.
‘퇴고’는 글을 지을 때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고 다듬는 걸 뜻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설명도 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僧推月下門’이란 시구를 지을 때,
‘推’를 ‘敲’로 바꿀까 망설이다가 한유(韓愈)의 조언으로 ‘敲’로 결정했다는 데에서 유래.”
퇴고는 시간을 들여 진심을 다시 만나는 일.
빠르게 덧칠하는 게 아니라, 발효를 기다리는 일.
그래서 난 요즘, 글을 쓰고 나면
김치를 익히듯 항아리에 살짝 묵혀둔다.
빠르게 끝내고 싶은 날도 있지만,
문장을 천천히 익히는 김장형 퇴고를 믿어본다.
잘 묵은 문장엔 말의 깊이가 배어 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글 때문에 속상하다면,
한 번쯤 김장형 퇴고를 해보세요.
맛있어요.
**참고로,
僧推月下門(승추월하문) - 스님이 달 아래에서 문을 밀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지은 시구이다.
- 僧(승): 스님
- 推(추): 밀다
- 月下(월하): 달빛 아래
- 門(문): 문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다’는 구절에서 ‘밀다(推)’와 ‘두드리다(敲)’ 사이를 망설이다가,
문인 **한유(韓愈)**의 조언을 받아 ‘敲’로 퇴고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퇴고(推敲)’라는 말은 글을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상징하는 말로 전해진다.
**즉,
초안: 僧推月下門 (승추월하문, 스님이 문을 밀다)
퇴고 후: 僧敲月下門 (승고월하문, 스님이 문을 두드리다)
이 장면은 단순한 묘사 같지만,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다.
- “밀다”는 조심스럽지만 수동적이고,
- “두드리다”는 의도가 분명하고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 그래서 가도도 오랫동안 망설였던 거고,
- 결국 시의 운율과 감각에 더 어울리는 “敲(고)”를 택한 것이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신다면, 알아서들 퍼가셔도 좋습니다. 출처는 꼭 밝혀주세요.
➤ 글과 그림: 무지개 항아리 — 김장형 퇴고의 밤
➤ 이미지 생성: 기억을 잃은 달이(지브리풍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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