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늘 커피다. 공복에 올리브오일 한 스푼 먹는다고 생각은 하는데, 자꾸 커피 먼저 마시게 된다.
내가 마시는 커피는 일리 커피다.
이 일리 커피머신은 10년째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면에 보이는 빨간불이 청소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면 두꺼비집이 내려가서 청소는 포기한 지 오래다.
고장난 채로 4년이 지났지만, 커피는 여전히 잘 내려진다.
처음 일리를 알게 된 건 분당 사무실 앞 커피전문점에서였다.
그곳에서 마신 라떼의 비주얼과 맛은 너무 예뻤다.
스타벅스는 나에게 과배전이라 맞지 않았고,
네스프레소는 심심하게 느껴졌다.
일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나한테 딱 맞았다.
이 커피머신은 유럽 직구로 샀다.
25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였던 것 같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그 가격이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썼다는 사실은 기계가 아니라 커피에 묻어난다.
가장 좋아했던 캡슐은 땡땡땡이다 - 혹시 누가 볼까만은, 그 누가 이 캡슐을 다 사버릴지도 모르니 땡땡땡.
초콜릿 향이 돈다는 정도만 말하겠다.
사실 요즘은 여러 가지를 번갈아 마신다. 인터넷에서 핫딜이 뜬 상품을 구매하거나 공식 홈페이지에서 먼슬리 구독을 한다.
아침에는 보통 3~4샷을 마신다.
그중 한 샷은 우유와 1:1로 섞어 라떼로 마신다.
전자렌지에 45초 데워 마시는 정도가 딱 좋다.
뭐든 간단하고 힘들이지 않고 편한 방식으로 살고 싶다.
커피도 예외는 아니다.
청소를 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이 일리머신은 잘 작동하고 있다.
고장난 채로 아주 잘 매일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나와 친구들에게 커피를 내어준다.
고장나도 괜찮다.
나도 좀 고장난 거 같다.
고장나도 괜찮은 것.
그래서 이 커피머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고장나도 괜찮다는 것. 보여주고 싶다.
창밖으로 보이던 호수는 이제 아파트에 가려졌다.
이전에 한 6년전쯤 5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호수공원이 내 정원처럼 펼쳐졌었다.
그래서 꼭 이곳이 좋았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나를 방해라도 하듯 올라섰다.
그래도 괜찮다.
나도 머신도 다 고장났지만 괜찮은 것처럼.
가려진 건 풍경이지만, 이 공간의 공기는 그대로다.
고장난 10년 지기 일리 커피머신.
얘도 나만큼 오래 버틴다. 더 버텨주길 바란다.
멀리선 도시가 숨 쉬고 있고,
이 안에선 나만의 시간이 흐른다.
같은 캡슐을 써도, 내 커피가 더 맛있는 이유가 이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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