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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 말이 아니라, 맥락이었다

무지개항아리 2025. 3. 26. 18:04

사라진 건 말이 아니라, 맥락이었다

번역은 감각의 문제입니다.
단어를 많이 안다고, 문법에 능숙하다고 다 번역이 되는 건 아니죠.
요즘은 번역기도 훌륭해서, 모국어가 아니어도 제법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줍니다.
문법도 맞고, 단어도 적절하고, 문장도 매끄럽습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남습니다.
말이 닿지 않는 느낌. 마음이 옮겨지지 않은 문장.
뭔가가 비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말은 있는데, 그 말이 왜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사라진 건, 말이 아니라 맥락입니다.

어색한 번역은 보통 단어가 틀려서가 아니라
‘문장이 서 있는 자리’를 모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기계는 주인공의 표정을 보지 못합니다.
숨결도, 리듬도, 장면 전체의 분위기도 읽지 못하죠.
그래서 말은 번역되었을지 몰라도,
말이 놓인 자리는 번역되지 않습니다.

✔ 예를 들어볼게요.

 

“그랬군요.”

일본어 “そうだったんですね.”를 기계 번역하면
보통 “그랬군요.”라고 나오죠.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런데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한국어가 돼야 합니다.

  • 부드러운 공감: “아, 그러셨군요.”
  • 사과 섞인 수긍: “죄송해요, 몰랐어요.”
  • 무심한 반응: “그랬군요.” (무표정)

같은 말인데, 전혀 다른 정서가 담기죠.
이런 차이는 기계가 아닌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어요.

“You shouldn’t have.”

기계 번역은 흔히 “그러지 않으셨어도 되는데요.”
문법은 맞지만, 기쁨과 감동이 빠진 무미건조한 표현이 되기 쉽죠.

실제로는 선물을 받았을 때, 감동하며 말하는 말이에요.

  • “어머, 이런 걸 다 준비하시다니…”
  • “와… 진짜 고마워요. 감동이에요.”

그런데 요즘 번역기 중에는
“그러지 말았어야지!?”처럼
말투와 감정까지 잘 살려주는 경우도 있어요. 물론 느낌표와 물음표는 제가 넣어 봤습니다. 

아래는 한 유명한 번역 사이트의 실제 번역입니다:



→ 이 한 줄에 담긴 마음은
고마움, 감동, 놀람, 민망함, 귀여운 투정이 섞인 복합 감정이에요.
단어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뉘앙스.
이걸 감지하는 건 결국 사람의 감각이죠.

“I’m fine.”

직역하면 “나는 괜찮아.”
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이렇게 달라집니다:

  • “됐어. 나 괜찮아.” (억지로 참는 중)
  • “응, 걱정 마. 진짜 괜찮아.” (안심시키는 말투)
  • “괜찮긴 뭐가 괜찮아.” (반어적 표현)

이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인지,
그냥 참는 중인지,
기계는 알 수 없습니다.

“That makes sense.”

기계 번역은 “그건 말이 되네요.”
하지만 실제 대화에서는 이렇게 달라져요:

  • “아~ 그렇구나!” (이해의 순간)
  • “그러면 이제 납득이 되네.” (긴 의문 끝의 깨달음)
  • “음… 뭐, 말은 되지.” (약간의 회의)

맥락 없이 번역하면, 이 말은 어디에도 맞지 않고
어디에나 써버릴 수 있게 됩니다.


#편집자의 일

편집자의 일은
문장을 고치는 게 아니라,
문장이 머무를 자리를 다시 만들어주는 일
이에요.

그래서 편집은 늘 ‘다시 읽는 일’,
그리고 ‘다시 듣는 일’이기도 하죠.
맥락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으니까요.


#다음 편 예고

“어떤 문장은 덜어낼수록 빛난다.”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지우는 편집’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할게요.